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폴레옹 2세 (문단 편집) === 친구 프로케쉬, 그리고 죽음 === 1830년에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터진 후 일부에서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나폴레옹 2세를 옹립하자는 목소리가 약간은 있었으나, 프랑스 국민 대다수가 그를 오스트리아 공작으로 여겼고 현실적으로도 나이가 어려 정치경력이 없던지라 이는 불발되었다. ~~메테르니히: 계략 성공!~~ 물론 이후의 프랑스 정국이 2월 혁명, 보불전쟁, 파리코뮌 등으로 여러번 격동했기 때문에 한 자리 차지하거나 국왕, 황제,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도 있을 기회는 있었지만 그러기도 전에 병으로 요절했으니 IF로만 남을 뿐. 오스트리아에서 유일한 친구였던 프로케쉬는 언제인가 『워털루 전기』라는 책에서 나폴레옹을 옹호했던 적이 있었고 이에 감동한 나폴레옹 2세는 그와 친구가 되었다. 프로케쉬는 1832년 7월 21일 로마에 살고 있는 나폴레옹 2세의 친할머니 레티치아를 만나서 그의 근황을 전하고 "나폴레옹은 매우 훌륭한 청년이고,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레티치아는 매우 기뻐하며 "그 아이라면 아버지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지요. 머지않아 그 아이의 시대가 오고, 다시 프랑스의 왕좌에 오르게 될 것이라 전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케쉬가 레티치아를 만난 그날, 나폴레옹 2세는 병상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날인 1832년 7월 22일, 나폴레옹 2세는 [[쇤브룬]] 궁전에서 요절했다. 이 때 나이는 불과 21살. 이종사촌 동생 [[페드루 2세(브라질)|페드루]]의 브라질 황제 즉위와 6촌 동생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비토리오]]의 피에몬테 공 서임이 있은 지 1년 후의 일이었다. 위독해진 아들이 급하게 어머니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 루이즈]]가 빨리 달려와 아들의 최후를 지켰다. [[파일:Napoléon II's Death.jpg|width=500]] 나폴레옹 2세의 죽음. 나폴레옹 2세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은 외조부 [[프란츠 2세]]뿐이었다.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기억하는 궁정과 황실 친척들 사이에서 눈칫밥으로 연명하던 나폴레옹 2세는 장래의 위협적인 인물이었고, 그 아이를 위해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고 자신 외에는 누구에게도 슬프지 않을 거라고 한탄했다. 그의 친구도 나폴레옹이 어릴 때부터 위축되어 크지 않았다면 훨씬 상태가 나았을 거라고 안타까워했다. 나폴레옹 2세의 석관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용 묘지인 카푸친 교회에 안장되었다. 합스부르크 전통에 따라 심장을 비롯한 장기들은 분리되어 안치되었다.[* [[레오폴트 1세]]의 형인 페르디난트 4세 이래 19세기까지 유지되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 그래서 그의 시신이 훗날 프랑스 파리로 옮겨진 후에도 그의 심장과 창자는 빈에 안치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